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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생활스포츠’ 아줌마 당구 열풍
[레저]‘생활스포츠’ 아줌마 당구 열풍

영화나 드라마 속에서 당구장은 액션 장면이 벌어지는 단골 장소다. 자욱한 담배연기와 희미한 조명 사이로 당구공이 날아다니고 큐가 부러지는 것은 예사다. 좀 더 다이내믹한 장면에서는 주인공에게 일격을 당한 악당이 2층 창문을 깨고 거리로 나가떨어지곤 한다. 사실 십수년 전만 해도 당구장은 ‘동네 형님’들이 자주 머무르는 다소 ‘위험한 공간’이었다. 그 때문에 당구는 남성들만의 스포츠로 인식돼왔다.

하지만 당구장 격투가 어색해질 날도 멀지 않은 듯하다. 1990년대 초 청소년들의 당구장 출입이 가능해지고 당구가 생활스포츠로 인정받으면서 꾸준히 옛 이미지를 벗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당구아카데미와 문화센터 당구교실엔 체계적으로 당구를 배우려는 여성들로 붐빈다. 특히 그중에서도 과거 당구에 관심이 있어도 주위의 시선과 열악한 당구장 환경 때문에 배우기를 포기했던 중장년층 여성들의 ‘향학열’이 뜨겁다.

‘아줌마 당구열풍’을 확인하기 위해 서울 서초동 한국당구아카데미의 당구장을 찾았다. 20여 명이 당구 연습에 한창이었는데 그중 5~6명이 여성이다. 사실 이곳에서 당구 치는 여성을 찾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300여 명의 전체 수강생 중 120여 명이 여성이기 때문이다. 그중 40~50대의 중년층 여성이 수십 명에 달하고 70대 이상도 10명이 넘는다. 이곳 ‘맏언니’는 83세 할머니다.

여성들이 포켓볼을 주로 배운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수강생의 70%는 4구를 배우는 ‘정통파’다. 비록 힘이 남성에 비해 달리기는 하지만 특유의 섬세함을 보완해 스리쿠션도 척척 쳐낸다. 그 때문에 남성들과 성대결에서 밀리지 않는 여성 고수도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이곳을 찾은 여성들은 대부분 ‘용기’가 있는 사람들이다. 많이 좋아졌다고는 하지만 아직 당구장에 대한 인식이 확 바뀐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의 당구 입문기는 당찰 수밖에 없다.

300점대를 치는 주부 홍순향씨(53)는 14년 전 동사무소 여성당구교실이 처음 문을 열었다는 얘기를 듣고 망설임없이 신청 했다. 사실 그때만 해도 여성이 당구 치는 게 흔치 않은 시절. 호기심은 있으나 배울 곳이 마땅찮았던 그에게는 절호의 기회였다.

“모집인원에 한참 모자라는 5명만 신청을 했어요. 그중에 저만 4구를 배웠죠. 6개월 치니 80점을 칠 수 있더라고요.”

홍씨는 당구교실을 마치고 마땅히 게임을 칠 곳도 상대방도 없어서 실력을 묵혔다가 3년 전 이곳 소식을 뒤늦게 접하고 다시 실력을 닦고 있단다.

“생각했던 길대로 공이 굴러가 점수를 냈을 때만큼 짜릿할 때가 없죠.”

홍씨의 당구실력은 홍씨가 다니는 교회에서도 유명해 교회 청년들과 친선게임을 즐기기도 한단다. 교회에서 젊은 아줌마로 인기짱인 것은 물론이다.

큐를 잡은 지 4개월째인 주부 임은양씨(50)는 우연히 케이블TV 당구중계를 보다 ‘살아 움직이는 듯한’ 당구공의 매력에 푹 빠졌단다. 한번 꼭 배워보겠다는 생각이 들어 임씨는 직접 인터넷 ‘마우스품’을 팔아 이곳을 찾았다. 또 남편과 함께 직접 교육장에 들러 남편의 ‘우려’를 덜어줬단다.

“살림만 하다 보면 머리가 굳어지는 느낌이 드는데 당구 시작하면서 많이 덜해졌어요. 공을 잘 치려면 계속 생각하고 집중해야 하거든요. 이 나이에 무엇을 새로 배우고 있다고 생각하니 그렇게 좋을 수가 없어요.”

임씨는 요즘 늦게 배운 당구에 시간가는 줄을 모른다. 일주일에 3일 당구장에 ‘출근’을 하고 당구대 앞에 한번 서면 4~5시간을 훌쩍 보낸단다. 집에서도 당구교본을 틈틈이 독파하고 있다고.

“밥상을 차릴 때 국그릇과 밥그릇이 당구공처럼 보이는 것 있죠. ‘요렇게 치면 이렇게 들어가겠구나’ 하고 저도 모르게 손가락으로 공 가는 방향을 그려보게 돼요. 당구를 직접 배워보니 정말 재미있어요. 이제야 제게 딱 맞는 운동을 찾은 것 같아요.”

생활스포츠로 당구가 재조명 받기 시작한 것은 늦은 측면이 있다. 당구만큼 온 가족이 쉽게 즐길 수 있는 생활레포츠도 드물기 때문이다. 집주변을 둘러보면 당구장 하나쯤은 보일 정도로 찾기도 쉽고, 실내 스포츠라 사시사철 편하게 할 수 있다. 더구나 규칙도 간단해서 배우기도 쉽다. 또 1시간 정도 당구를 치면 4㎞ 걷기 운동 효과가 있다고 하니 ‘게임’보다는 ‘운동’인 셈이다. 게다가 당구는 힘과 각도를 계산해야만 공을 맞힐 수 있는 두뇌스포츠이기도 하다. 그 때문에 오래전부터 노인복지센터에서 치매예방법으로 활용되고 있다.

날씨가 쌀쌀해져 야외활동이 뜸해지는 요즘 당구는 가족이 함께 즐길 수 있는 생활스포츠로 딱이다. 이번 주말엔 가족, 부부끼리 집근처 당구장에서 ‘나이스 샷!’을 외쳐보는 것은 어떨까. 〈협조:한국당구아카데미〉

〈글 황인찬기자 hic@kyunghyang.com〉
〈사진 정지윤기자 color@kyunghyang.com〉